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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내 이름은 예쁜 할매

언제부턴가 나보다 나이 많은 정희씨가 ‘예쁜 할매’라고 나를 부른다. 내가 ‘정희씨’라고 부르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정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할망구가 된 아내를 청춘 시절처럼 이름 부르는 게 듣기 좋다.     한인회를 도와 준 총무는 세월이 지나도 ‘민경’이라 부른다. 이름을 부르면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애칭은 더 살갑다. 나를 ‘왕따까리’라고 부르는데 기분 좋다. 한번 붙으면 안 떨어진다는 뜻이라나. 세월은 늙어도 정은 늙지 않는다.     마트에 장보러 가면 나이 들어 보이는 어른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등이 꾸부정한 사람, 동작이 어둔하고 느린 사람을 보면 긴장해서 허리 꼿곳이 세우고 걷는다. 산소통을 끌거나 휠체어 탄 사람을 만나면 저 노인의 계절도 ‘한때는 건강하고 싱싱한 여름이였겠지’라고 슬픈 생각을 한다.   나이 들면 나이값 하는 게 좋다. 더덕더덕 화장 진하게 하고, 젊은 애들처럼 긴 머리 풀어 헤치고, 핏줄이 드러나는 쭈글쭈글한 다리를 용감하게 드러내는 초미니 바지 입은 늙은 할머니가 지나가면 곱게 늙어야지 생각한다.     공원이나 샤핑센터에서 다정히 손잡고 걷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부부를 보면 혼자 미소 짓는다. ‘잘 늙었구나’ 싶어 보기 좋다. 우아하면 늙어도 아름답다.   미국에 온 뒤 아트센터에서 동양화를 가르쳤다. 내 나이 스물 다섯, 학생들은 대부분 할머니뻘 되는 분들이고 나는 물 오른 버드나무처럼 싱싱했다. 콩글리쉬 영어로 더듬거리며 수업했는데 깎듯이 선생 대접하며 손녀처럼 사랑해 주었다. 강의하는 동안 영어 실력도 늘어났고 서양요리법을 전수받는 행운을 얻었다.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배움은 희열과 희망을 준다.   학생 중에 에밀리와 조이스를 기억한다. 에밀리는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빗은 은백색 머리에 정숙하고 온유한 몸가짐, 따스하고 다정한 말로 수업의 격조를 높였다. 나이 들면 에밀리처럼 멋진 할머니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활달하고 거침없는 조이스는 공군부대 전투기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 CEO다. 대나무 획을 긋는 필력과 난초의 여리지만 강인한 힘에 매료돼 강의신청을 했다며 스트레스 푼다는 핑계로 포도주를 들고 와 분위기를 연출했다.   조이스는 딸을 성추행한 첫 남편과 이혼하고 귀향해서 맨 손으로 기업을 일으킨 여장부다. 사업이 자리잡자 매니저에게 프로포즈 해서 사장 만들고(?) 결혼해서 잘 산다. 파란만장한 삶을 모질게 견뎌내고 우뚝 선 여장부는 늙어도 늠름하다.   ‘내 이름은 빨강’은 2006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만 파묵의 일인칭 소설로 등장 인물들이 번갈아가며 화자로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다. 죽여지고 우물로 버려진 사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오스만제국 예술가들의 치열한 삶과 사랑을 생생하게 재현한 작품이다. 다양한 색깔을 가진 목소리들이 겹쳐지며 작가는 빨강이 가진 의미를 빨강 본인의 목소리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사람은 자기 이름, 자신의 색깔로 산다. 누군가 미소 띄며 당신의 이름 불러주면, 주름진 얼굴에 예쁜 애칭을 붙여준다면. 용기와 결단에 박수 보내며, 나이값 타박 대신 포용으로 감싸주며, 아픔 견뎌내고 당당하게 살아온, 처진 어깨 안아주면, 하얀 손수건에 달린 명찰의 이름 석자로 남은 세월의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식을 지켜보던 측백나무는 너무나 푸르렀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이름 할매 자기 이름 나이값 타박 나이 스물

2023-06-06

[시조가 있는 아침] 매화 옛 등걸에

  ━   매화 옛 등걸에     매화(생몰연대 미상)   매화 옛 등걸에 춘절(春節)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병와가곡집     ━   자존감 높았던 조선 기생들     매화는 명기(名妓) 구인(九人) 중의 한 사람으로 『해동가요』에 기록돼 있는 평양 기생이다. 유춘색이란 사람이 평양감사로 부임해와 매화와 가까이 지냈으나 나중에 춘설(春雪)이란 기생과 가까이하자 이를 원망하며 지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매화라는 자기 이름과 꽃의 이름을 이중의 뜻이 되게 한 중의법(重義法)이다. 또한 자신의 늙어진 몸과 고목이 된 매화라는 이중의 뜻을 실은 중의법이기도 하다.   춘절(봄철)과 연적(戀敵) 춘설의 이름을 초장과 종장에 배치한 것도 재미있다. 이 시조는 또한 옛날에 피었던 가지에 다시 꽃이 피듯이 한동안 안 오던 정든 이들이 올 듯도 하지만, 때아닌 봄눈이 어지럽게 흩날리듯 세상이 어지러우니 못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치적인 뜻으로도 풀이된다.   조선의 기생들은 신분 규제에서 벗어나 시인을 비롯해 뛰어난 예인(藝人)이 많았다. 명기의 자존심 또한 높았다. 송이(松伊)라는 기생이 역시 자신의 이름에 빗대 쓴 시조 한 수를 읽는다. 나는 깎아지른 절벽의 낙락장송이니 나무꾼의 낫 같은 것으로는 걸어볼 생각도 말라는 기개가 고고하기만 하다.   솔이 솔이라 하여 무슨 솔만 여기는다   천심(千尋) 절벽에 낙락장송 내 긔로다   길 아래 초동의 접낫이야 걸어볼 줄 있으랴 유자효 / 시인시조가 있는 아침 매화 조선 기생들 자기 이름 신분 규제

2022-12-22

매화 옛 등걸에 - 매화(생몰연대 미상)

매화 옛 등걸에   춘절(春節)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병와가곡집   자존감 높았던 조선 기생들   매화는 명기(名妓) 구인(九人) 중의 한 사람으로 ‘해동가요’에 기록돼 있는 평양 기생이다. 유춘색이란 사람이 평양감사로 부임해와 매화와 가까이 지냈으나 나중에 춘설(春雪)이란 기생과 가까이하자 이를 원망하며 지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매화라는 자기 이름과 꽃의 이름을 이중의 뜻이 되게 한 중의법이다. 또한 자신의 늙어진 몸과 고목이 된 매화라는 이중의 뜻을 실은 중의법이기도 하다.   춘절(봄철)과 연적(戀敵) 춘설의 이름을 초장과 종장에 배치한 것도 재미있다. 이 시조는 또한 옛날에 피었던 가지에 다시 꽃이 피듯이 한동안 안 오던 정든 이들이 올 듯도 하지만, 때아닌 봄눈이 어지럽게 흩날리듯 세상이 어지러우니 못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치적인 뜻으로도 풀이된다.   조선의 기생들은 신분 규제에서 벗어나 시인을 비롯해 뛰어난 예인이 많았다. 명기의 자존심 또한 높았다. 송이(松伊)라는 기생이 역시 자신의 이름에 빗대 쓴 시조 한 수를 읽는다. 나는 깎아지른 절벽의 낙락장송이니 나무꾼의 낫 같은 것으로는 걸어볼 생각도 말라는 기개가 고고하기만 하다.   솔이 솔이라 하여     무슨 솔만 여기는다   천심(千尋) 절벽에     낙락장송 내 긔로다   길 아래 초동의 접낫이야     걸어볼 줄 있으랴 유자효 / 시인매화 미상 조선 기생들 자기 이름 신분 규제

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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